우리는 성령께서 내 모습을 보여주시기 전에는 내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저도 넥타이 매고 양복 입으면 신사 같습니다. 깨끗한 사람 같습니다. 오늘 같은 주일에 가운을 입고 강대상에 서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은 아직도 여전히 새까만 숯 덩이 같은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날마다 책망하셔서 회개로 씻어내도록 해주시는 성령의 책망의 은혜야말로 제게는 얼마나 큰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성령의 은혜가 내 속에서 가르쳐줍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성령님의 음성이 나를 감동시킵니다.계속 감사 속에서 썩은 죄가 마치 몸 속에서 자꾸 토해 버리는 느낌을 받습니다.내 속 사람은 깨끗해집니다.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던 예수의 대속을 모르고 지금 것 지낸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를, 책망하시는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본문 말씀 가운데 나타난 또 하나의 은혜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생활을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자식이라도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식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식이 있는 것처럼 성도도 마찬가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그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성도들이 있는 반면,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생활이 복잡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말 듣지 않고 따로 논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엄마의 부드러움 같은 성령이 나의 불의를 말하는데 고집스럽게 거역 안 합니까?
이리 가자는데 저리로 가고, 이거 하자는 데 저거하고 그렇게 사는 하루가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어차피 엄마가 데리고 가는 대로 가게 될 거면서 결국엔 시간만 허비하게 됩니다. 힘만 두배 세배로 들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은 언제나 성도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끌려가든지 자원해서 따라가든지 결국은 성령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이때에 자발적으로 성령을 따라가는 것이 더 큰 복을 받는 비결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자원하여 성령을 따라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큰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시키면 안됩니다.성령은 나의 불의를 보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친이 간구(懇求)하십니다.(롬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