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을 열 때에 상대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먼저 희생하시고, 친구로 다가오시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오직 두 곳에만 '친구'라는 말이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불신 세계에서 예수님을 평가하는 말 중에 '친구'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7: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은 그가 와서 빵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니까 기이한 사람, 미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의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와 창기 같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함께 다니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마태라는 사람은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묵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그러한 말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 민중이 붙여준 이름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친구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까지 흉허물없이 다 말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온갖 비밀을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길이시었고, 진리시며 생명이시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바로 가르쳤습니다.고대 헬라의 철학자 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사랑은 즉 [필리아]는 단지 동등한 사람들만을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유인은 결코 노예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욱 사람이 신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정'이란 단지 동등한 사람들의 폐쇄된 영역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지만 유유상종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재도 상류사회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사람으로 나뉘어지고, 사귀는 사람도 다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친구의 정을 나누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고 하신 것은 정말 듣기도 황송한 일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러야 합니다. 친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 편에서 높으신 분이 낮아져서 친구라고 불러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나추시되 "죽기 까지 " 나추셨던 분이십니다.(빌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