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에『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을 형편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보다 옆에 있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 염려하고 계심은 심각하게 보지않을 수 없습니다. 나사로의 병듦으로 말미암아 의심을 품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도 주님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우리들 생각으로는 병든 나사로를 위해 급히 달려가야 될 예수가 급히 서두루지 않은 것이 이상했으나 예수의 속마음에는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마리아와 마르다는 번갈아 가면서 문 밖에 나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실 시간은 지체되어 가고 나사로의 생명은 점점 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형편을 아신 주님께서는 단숨에 달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표현을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고통을 당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는 아마도 그 이틀이 천년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별별 생각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오시지 않았을까?' '우리가 겪고 있는 형편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오시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이 미워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시는 중에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지만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본문을 지나치고 본문의 흥미와 교훈들을 놓치고 맙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 의문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1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 이럴 수가! 죽은 나사로가 아니라 옆에있는 제자들의 믿음에 거름을 주고 계셨습니다.